여당(藜堂) 김재원(金載元)은 초대 국립박물관장으로 25년간 재직하면서 국립박물관의 기틀을 잡았다. 그는 6·25전쟁 중에 중요문화재를 고스란히 피란시켜 전란 속에서 국보를 지켜낸 공로자로 칭송받고 있다. 한국 최초로 미국과 유럽에서 국보해외전시회를 열어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린 문화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아호 여당은 “검소한 생활을 뜻하고자 한 것”이라고 이두현 교수는 풀이했다. 김재원은 박물관장으로 있으면서도 평생 골동품 수집을 멀리해 후학들에게 솔선수범했다.김재원은 미술사·고고학 분야에서 인재양성에도 힘써 김원룡 교수를 비
단암(丹菴) 이필석(李珌奭)은 말단 은행원에서 산업은행 총재까지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6·25전쟁 중에 일본에 유학한 후 ‘전후일본부흥상’이란 연구서를 내 한국 경제의 전후 재건 지침서로 삼게 한 금융인이다. 그는 광복 직후 평양 신탁은행 근무 중 소련군 헌병사령부에 맞섰다가 최초로 탈출, 월남한 금융인이기도 하다.그의 형 병석(炳奭)도 도쿄상대 졸업 후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근무하다 일본 행정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의 재무부 이재국장 등을 역임했다. 단암의 장남 봉서(鳳瑞)는 상공부 장관과 동력자원부
이휘소(李輝昭)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천재 물리학자이다. 그는 새로 전개되는 소립자 물리학 이론의 선두에 선 물리학자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반열에 올랐던 과학자였다. 비운의 교통사고로 1977년 42세로 요절했으나 그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와인버그-살람(1979년)과 트후프트, 벨트만(1999년), 그로스·웰첵·폴리처(2004년) 등이 노벨상을 받게 했다. 1974년 이휘소는 참 쿼크(Charm quark)와 관련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여, 참 쿼크가 존재할 경우
정지용(鄭芝溶)은 ‘향수’ ‘고향’ ‘백록담’ 등 한국인이 읊어온 애송시를 쓴 국민 시인이다. 그는 ‘천재 시인’ 이상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박목월·박두진을 추천으로 등단시키기도 했다. 지용과 함께 우리 문단을 풍미했던 김기림은 지용이 “조선 신시사상(新詩史上)에 새로운 시기를 그은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꽃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해강(海崗) 김수근(金壽根)은 광복 후 연탄을 대량 보급하여 연료혁명에 앞장선 에너지 전문 기업인이다. 장작 대신 연탄을 땔감으로 쓰게 하여, 헐벗은 민둥산에 겨워하던 전국의 산야를 짙푸른 녹지로 변모시킨 산림녹화의 기수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연탄사업으로 출발해 석유, 도시가스, 산업가스, 해외유전개발, 열병합발전 등 에너지 사업을 일념으로 입지한 에너지맨이다. 정경유착의 유혹을 물리치고 한 우물만 판 그를 전경련은 ‘한국 기업인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신 분’이라고 기리고 있다. 그의 아호는 ‘바닷속에 잠겨있는 산등성(崗)’이란
홍종인(洪鍾仁)은 한국 언론계에서 ‘대기자 홍박’으로 통해온 언론인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동화통신 회장을 지낸 그는 일찍이 정부 수립 후 한국산악회장으로 산악대원들을 이끌고 독도에 상륙하여 ‘한국령’ 표지판을 각인한 행동파 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이다. 헌칠한 키에 잘생긴 용모에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발기하고, 박물관협회장을 지냈는가 하면, 논설과 취재, 사회면에서 문화면에 이르기까지 어느 분야에도 출중한 만능기자여서 독립신문 이래 손꼽히는 한국의 대표기자로 추앙받는다.“훤하게 트인 이마, 드골 코보다 더 멋있는 반듯한 코, 호
열운(洌雲) 장지영은 일제식민통치하 물산장려운동과 3·1만세운동을 선도한 애국지사이다. 그는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문자보급운동에 앞장섰고, 국어학자로 일제말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2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열운이란 아호는 ‘열수=한강(漢江) 위에 뜬 구름’이란 뜻으로 스스로 지었다.장지영은 1887년 4월 22일 서울 서대문구 교남동 132번지에서 장은상과 영해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부터 집에서 한문을 배운다. “나는 매우 완고하고 한학을 숭상하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교육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해암(海岩) 박순천(朴順天)은 3·1운동에 참여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이자 광복 후 5선 의원에 한국 최초의 여성 제1야당 당수를 지낸 정치인이다. ‘박할머니’라는 애칭에 걸맞게 거친 정치풍토에서도 ‘여성으로서의 품격’을 지켜온 특이한 카리스마가 곧 박순천이 지닌 인간적 매력이다.“‘박할머니’는 대학교수의 부인이요, 3남3녀의 어머니다. 그는 앉고 서는 것 하나하나에 여성으로서의 품위가 몸에 배었고 큼직한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가정의 식단이며 영감의 약, 아들 딸의 담임선생 이름까지 적을 만큼 자상한 사람이다. 그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은 서민을 친근하게 그려온 국민화가이다. 그는 ‘한국의 밀레’라고도 칭송된다. 12세 되던 해 밀레의 ‘만종’ 복사판을 보고 감동했던 것이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결정적 계기였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우뚝 선 독학화가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화가’의 꿈을 이뤄낸 불굴의 인물이다.“쓰라린 세월의 고통과 신음소리까지도 화강암 질감 같은 화폭 속으로 가라앉혀서 따뜻한 긍정과 선의의 세계를 열었던 미의 순교자였다.”(김병종 ‘화첩기행’)“박수근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경리(景利) 박금이(朴今伊)는 26년간에 걸친 생애를 건 치열한 집필로 민족의 대서사시 ‘토지’를 완성한 휴머니스트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서 1994년에 완성한 ‘토지’는 개인적 비극의 묘사로부터 출발한 박경리문학이 그 이전의 장편소설(‘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에서 개인과 사회와 민족비극의 형상화로 확대하였다가 그 모두를 수렴·종합해 이룩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한 작가가 40대에 쓰기 시작하여 60대 후반에 완성을 보게 된 이 작품은 문자 그대로 ‘필생의 역작’이라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동한 김준엽(金俊燁)은 사상계 주간,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온몸으로 자유와 정의를 지켜온 실천적 지성이다. 그는 일제 말에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이범석·지청천 장군 휘하의 핵심 광복군으로 금의환국하며, 자유당 치하에서는 광복군 동료 장준하와 더불어 사상계를 발간해 4·19혁명을 이끄는 매체의 주역 구실을 한다. 1980년대 고려대 총장 시절 신군부에 맞서 총학생회 부활 등 학원의 자유를 쟁취한 용기있는 학자의 표상을 보여줬다. 역대 정권에서 총리, 장관 등 요직을 권유받았으나 의연히 물리쳐 고고한 선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은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다. 그는 향토색 짙은 우리 고유의 미감이 풍부한 그림 속에, 반 고흐와 비견되는 화풍을 표출한 글로벌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기왕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 벽화나 고려청자의 무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와 조선 후기 김정희의 서예 등 여러 종류의 민족문화 유산에서 유래되는 기법을 구사하여 수준 높고 민족색이 풍부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같은 덕목들은 사실 8·15 광복 이후 지금까지 모든 문화예술 부문의 창작과 비평
유민(維民) 홍진기(洪璡基)는 건국 후 최초로 대일 손해배상청구 작업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한 지사적 관료이다. 그는 6·25전쟁 후 제네바회담 대표로 참석하여 남북 평화통일의 원칙을 마련했다. 자유당 말기 격동기에 최연소(42세) 법무부 장관을 지낸 데 이어 내무부 장관 재직 중 일어난 4·19혁명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때의 좌절을 떨치고 일어난 유민은 중앙일보 창간과 TBC방송을 함께 묶어 종합 매스컴의 바람직한 전형을 제시한 탁월한 언론기업인으로 추앙받고 있다.홍진기는 1917년 3월 13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1동 841번지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는 조선일보 논설주간, 조선중앙일보 주필, 서울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경향신문 주필에 초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소문난 항일운동 집안 출신이어서 일제하 신간회 활동을 계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할 때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그의 조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국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다.“일본인들은 건청궁 내전에서 고종과 왕세자인 이척을 발견하였는데… 그 내전으로 여러 명의 일본인이 뛰어들어와 고종의 어깨를 칼로 찌르고 비틀거리는 국왕을 밀치면서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추계(秋溪) 최은희(催恩喜)는 한국 최초의 일간지 여기자이며, 3·1독립만세운동 때 여학생으로 시위에 앞장서서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이다.“최 여사와는 도쿄 유학시절 동문수학을 하였고 8년 동안 대한부인회 일을 같이 하였다. 그는 지성인(知性人)이요, 지성인(至誠人)이다. 박학다문하고, 참대와 같이 곧은 사람이며,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열정적인 인물이다.”(박순천 전 민주당 대표)“선생에 대한 존경은 비단 신문계의 대선배라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여성으로서 오히려 민족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시어 옥살이까지 하신 분으로 알고
원봉(圓峯) 유봉영(劉鳳榮)은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옥고를 치렀고 상하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대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이후 조선일보 폐간과 복간을 함께하며 주필·부사장으로 공화당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켜내려 했다. 그는 최남선·김도태·이병도·김상기 등 역사학자와 교유하며 간도 등 북방영토에 대한 연구 모임인 백산학회를 창설하여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일찍이 대비해 온 선각자이기도 하다.유봉영은 1897년 1월 27일(음력) 평북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 230번지에서 강릉 유씨 유학요(劉學堯)와 하동
이종욱(李鍾郁·1945~2006)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으로 전 세계 질병퇴치전선 사령탑을 맡아 활동하다 장렬하게 순직한 ‘인류의 주치의’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와 나눔을 실천한 ‘참 의료인’으로, 국제보건 및 국제협력·봉사 분야에서 헌신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기구 선출직 수장(首長)이 돼, 뒤어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키는 선도자가 됐다. 세계의 저명 인사들이 이종욱의 위대한 업적을 크게 기리고 있다.“이종욱 총장은 조류인플루엔자가 나타날 당시 선두에 서서 대책을 세웠고 에이즈와 결핵에 이르는
월봉(月峰) 한기악(韓基岳)은 3·1독립선언문의 제작·배포에 관여한 독립운동가이며 동아일보 편집인·발행인, 조선일보·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다. 그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과 민족운동의 구심체였던 신간회 창립을 주도했다. 동료 언론인 유광렬은 ‘내가 50년 동안 기자로서 본 바로는 주야로 나라를 생각하는 이는 그뿐’이라고 자신의 저서 ‘기자 반세기’에 썼다. 이희승은 월봉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그는 신문인으로서 동분서주하였는데 그것은 곧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당시의 언론인은 지사요, 독립운동가로
동리(東里) 김시종(金始鍾)은 현대 한국 문단을 이끌어 온 걸출한 문인이다. 그는 토속적인 한국 고유의 가치를 지키는 민족문학으로 인본주의의 틀을 다져온 우리 문학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지난 50년간 우리 문학에서의 대부는 김동리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좌·우라는 개념으로 말하자면 김동리는 대표적 우익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하곤 했지만, 그는 그 이전에 더 깊이 ‘문학의 본령’에 가장 투철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소설가 이호철)김동리는 대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본분인 소설도 최상급으로 써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한국 근대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자이다. 3·1 만세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간 옥고를 치른 최남선은 1908년에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의 창간인으로 어문일치의 글을 써서 현대글의 기초를 닦았다. 또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우리 문헌의 보존·간행 작업에 앞장서 한국학 탄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일제 학자들의 어용 ‘단국신화’에 맞서 동북아문화사를 아우르는 최남선 특유의 ‘단군론’을 내세워 식민사관에 도전했다.육당의 아우 각천 최두선은 중앙고교 교장·경성방직 사장을 거쳐 광복 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